top of page

Notes for Oh! Swing & Pickle in Dead Christ's Box

〈그네! 뛰어 Oh! Swing〉

작업의 시작점은 공간과 몸, 즉 공간 속 몸 혹은 몸 속 공간, 이 이상한 관계를 그림 속 ‘형태’로 따라가고 싶은 바람.
그림에서 나는 ‘그네’를 본다, 그리고 그네뛰는 ‘여성의 몸’이 보인다. “성인 여성의 놀이”로 정의되며, 과거에 동서양에 걸쳐 공적인 장소에서 여성이 연기할 수 있는(풉)/즐길 수 있는 하나의 ‘스포츠’로서 그네뛰기는 흥미롭다. 좋다.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는 진자 운동이 만드는 최면적 반복 때문인지, 그렇게나 시적인 이유 없이도 그네뛰기는 엿봄의 대상이었다. 신윤복의 그림 속 바위 사이로 싱글 벙글 웃는 청년들의 얼굴은 언제나 봐도 그 그림의 가장 웃긴 지점이다. 프라고나르의 그네 타는 여인의 발 밑에서 덤불 그늘에 드러누운 신사의 눈은 옛날 동물 다큐멘터리에서 본 발정난 말의 눈동자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프라고나르의 재치 때문이겠지; 보이고 안 보이기를 반복하며 문턱 같은 공간을 오간다. 개인은 지워지고 캐릭터만 남는다, 동시에 개인의 욕망과 즐거움의 순간이다, 드러나고 지워진다. 매혹적이다. 프라고나르의 지겹도록 베시시거리는 붓질의 가벼움은 그네 타는 여성이 바스락거리는 시폰 드레스의 겹을 화려하게 흩날리는 것과 연결된 퇴폐적 가벼움이다. 절대 가볍지 않다.

왔다 갔다 왔-다 갔다--. 들어가고 나가고, 나갔다가 들어가고. 은색 물감을 판판하게 밀어 바른다. 벽돌을 쌓아 올릴 때 그라우팅할 때처럼 스크래퍼로 캔버스 위에 짜둔 물감을 밀고 지나간다. 만들어지는 매끈한 면은 금속판처럼 빛을 반사한다. 나는 여기 있어! 외치는 즉물적인 줄무늬이자, 커튼의 겹이고, 악보의 오선이며, 물감 덩어리이다. 이 사이를 가르고 지나가는 흔들거리는 몸은 어떤 형태를 가질까? 자신 있게 동그란 형을 한 획으로 눌러 그리며 드러나기도, 가벼운 여럿 붓질 사이 바람같이 사라지기도 한다. 붓질은 하지만 형을 읽고 풀려나가지 않는다. (대상을 잃은 형은 결코 생각만큼 자유롭지 못하다-프라고나르도 성실한 페인터였자나)

그네를 타고 있는 사람의 형상이 보이-기 전까지 보이-는 것은 무엇이고, 피부로 와 닿는 선들이 그려내는 형태들, 그 자체로서 부드럽고 흩날리는, 동시에 당돌하고 유희적인, 그런 감각을 선과 형이 지닌 성격이라면, 이러한 '느끼는 형태'는 '읽히는 형상'으로 응결되고 어느 순간 풀려나옴을 반복하며 어떤 음조로 몸을 건들이나. 그림을 그린 몸, 그림을 보는 몸, 이를 어떻게 선이 그려낸 형태가 공통된 경험에 기대어 매개할까.
 

(노랑)
노랑은 항상 “미쳐가는” 색이었다. 김범의 〈노란 비명〉이 떠올라서인지, 샬럿 퍼킨스의 The Yellow Wallpaper 가 생각나서인지, 노란색이 범벅된 커다란 벽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가장 쓰기 어려운 색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런 어려움을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나를 보며 (견제해야만 하는, 과연?) 어떠한 남성 페인터의 전형을 스스로에서 찾은 것 같나? 그렇지만 나는 에베레스트를 오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뒷동산 산책도 놀이라고 말하는 것 뿐. 사진으로 담아내기도 가장 어려운 색 중 하나이다. 그림의 (사진을 통한) 재현 가능성을 사실은 믿지 않는 나이다.(하지만 오히려 가장 이동하기에도 유용한 매체이다)
매일 아침, 영원히 떠오를 해처럼 노랑은 무한하기 때문에 답답한가 보다. 아무리 두껍게 안료를 올려도 뒤에 비쳐 나오는 캔버스 면이 하얗다는 사실이 계속 떠오른다. 그래서 노랑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것은 쉽지 않다. 붓질이 겹치면서 농도 차이나 안료의 두께에 따라 차이라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반복이다. 반복이다. 스스로를 자꾸만 먹어간다. 특별히 팽창하지도, 수축하지도 않는다. 히스테릭한 노랑은 담담하고 중성적인 색이다. 격정적이지도, 밝지도, 우울하지도,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을 수 있는 가장, 지겹도록 애매한 색이다.



〈상자 속 피클 (누가 안 웃기대?) Pickle in Dead Christ's Box (Now Who Can’t Take a Joke?)〉

그림이 그림을, 스스로를 바라보면 어떠한 모습을 띨까. 내가 나 스스로 거울을 보면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을 떠올린다.
내가 이렇게 생겼다고? 웃기기도 하고 가장 익숙한 것이 가장 어색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림이 닫힌 상자처럼 느껴진다면 그 안을 헤엄치는 피클은 벽에 머리를 기대 박으며 상자가 열리기만을 기다릴까.
성벽을 부실 때 쓰는 파괴용 봉 같기도한 성기 모양 피클 안에는 여러 붓질이 이리저리 휘갈겨져 있다. 에너지가 모이고 응집된 중심지이다.
이리저리 감긴 붓질은 유희적이다.
떠다니는 에너지를 모아둔 것 같고, 이 응어리진 기둥을 또 휘감는 보라색 리본은 수줍으면서도 신랄하다.
귀여우면서도 잔인하다.
응집된 에너지는 터져나 가지 않고 피클 안에 축적된다. 피클이 오른쪽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이 시원시원하게 길을 내어주는 붓질들도 있기만 결국 양쪽에서 막힌 틀 내에 고인 형상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Copyright © 2026 by Juwon Jeong. All rights reserved. 

  • Instagram
bottom of page